#현대미술 #풍경화 #푸른빛 #일상의 온기
#추억의 공간
#contemporary art #landscape #bluelight #warmth #memory
BLUE LIGHT, LANDSCAPE
KOREAN PAINTING
Kang Ji-hyun is a writer who draws everyday landscapes and old buildings with affectionate eyes. The artist records in detail the moment when memories turn into memories, as if he would not miss even a single light of the flowing season and time and streetlights. I met writer Kang Ji-hyun, who captures the warmth of everyday life in blue.
강지현은 일상적인 풍경과 오래된 건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리는 작가입니다.
작가는 마치 흐르는 계절과 시간과 가로등의 빛 하나까지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기억이 추억으로 바뀌는 찰나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온기를 푸른빛으로 담는 작가
강지현을 만났습니다.
About coexistence, Wood frame and acrylic on canvas,
74,7cmX64.6cm, 2023.ⓒ다니엘 신
Chapter 1.
장소:
오래된 건물의 새로운 표정
#익숙한 공간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는 수많은 기억은 먹고 자고 일하고 웃고 울었던 수많은 장소와 얽혀 있습니다. 작가의 작업도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출발했습니다. 바로 ‘조명 거리’라 불리는 을지로 4가입니다.
을지로는 평생 조명일을 하신 아버지의 일터가 위치한 곳. 미로같은 골목을 꺾고 꺾으면 아버지의 가게가 있었습니다.
“을지로 대로변은 대도시 같지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안 가본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세계가 펼쳐져요. 저도 대학생 때까지 아빠 가게 가는 길을 헷갈렸을 정도예요. 시계 골목으로 가서 꺾고 꺾어 들어가야 하는데, 헤매고 있으면 옆 가게 사장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시다가 ‘거기 아니야!’하고 알려주시곤 했죠. (웃음)”
어깨를 맞대고 붙어있는 조명 가게에서는 항상 화려한 조명들이 반짝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는 환하게 타오르는 불빛들을 보며,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작가는 을지로의 오래된 골목 구석구석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그렸던 건 세운상가에서 내려다 본 을지로 일대의 모습이었죠.
“(을지로의 풍경을 보면) 앞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건물들이 모여있는데, 저 멀리에는 높은 빌딩들이 있거든요. 그 모습이 어느 한 쪽이 집어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세월을 보내고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작업 초기, 작가는 을지로 일대를 소재로 한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광목천에 오래된 건물의 정면과 옆면, 뒷면을 모아 만든 가상의 건물을 등장시켰죠. 한 폭의 그림에 을지로의 골목 하나가 오롯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 틈새의 흔적 - 창경궁로 11길 18, 천에 담채, 150x340cm, 2018. ⓒ 강지현
“정면으로만 그리는 게 아니고, 위에서 찍고 아래에서 찍은 것을 짜깁기 했어요. 360도로 건물이 보이게끔요.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낡은 특성이라든지, 특유의 분위기를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다가 조각조각 나눴던 것 같아요.”
<스며든 흔적-창경궁로 11길 26>에서는 4미터 길이로 이은 광목천에 아버지의 가게를 중심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을 횡으로 펼쳤습니다.
그가 포착하고 싶은 것은 을지로의 생동감이었습니다.
“을지로에는 모두가 엄청 바쁘게 일하거든요.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불빛도 환하고…. 활기와 생동감을 느꼈어요. 그 모습을 담기 위해 푸른색을 사용하게 됐죠. 저에게 푸른색은 상상과 환상, 생명력과 생동감을 나타내는 색이거든요.”
푸른색의 풍경화는 을지로 일대를 시작으로 작가가 나고 자란 동네와 할머니 댁 등 개인적인 추억이 묻어있는 공간으로 그 배경이 확대됐습니다. 친할머니 댁을 그린 시골 정경에서는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차가운 새벽 공기가 뺨에 닿는듯 합니다.
“할머니 댁은 정말 시골이라 나무랑 집, 가로등밖에 없거든요. 도시에서 보이는 LED 간판이 없어요. 푸른색으로 잠긴 세상에 빛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요. 그때의 하늘은 정말 이상적인 파란색이죠.”
Chater 2.
시간: 빛이 켜진 자리에는 사람이 있다
#각자의 불빛과 이야기
장소에 집중됐던 작업은 시간의 축을 세우며 더욱 확장됐습니다. 작가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인 ‘빛’이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을지로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조명이잖아요. 처음부터 빛을 그리고 싶었지만 한 번에 건물도 빛도 잘 그리긴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건물을 그리고 푸른색 안료를 사용하는 법을 잘 익힌 후에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빛의 이미지로 차근차근 작업을 확장해나갔죠.”
강지현 작가가 매일 버스를 타고 내리는 정류장에는 가로등이 있습니다. 매일 그 자리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듯 노란 불빛을 키고 서있는 가로등이 작가는 왠지 자신을 반겨주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낮에는 불빛이 많이 켜져 있어도 잘 보이지 않잖아요. 해가 지고 가로등이 딱 켜지는 순간, 익숙한 풍경이 다른 풍경이 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공간이 살아나고 있는 느낌?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밤이 되고 등이 켜지면서 목욕탕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듯이요.”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는 아파트에서는 큰 창문 너머로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주황 불빛들이 일렁입니다. 작가는 “조명이 켜진 자리에는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빛을 뽑아내고 있잖아요. 저녁 준비를 하는 사람, 작업하는 사람… 각각의 불빛에는 제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겠지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궁금해했으면 좋겠어요.”
최근 작품에는 조명의 불빛뿐 아니라 자연광도 등장하고 있는데요. 해가 저무는 때의 짙은 빛의 색을 초록색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와 주위의 빛무리가 그 시간대를 짐작해 보게 합니다.
Chapter 3.
기록:
기억이 추억이 되는 순간
#오래된 건물
우리의 얼굴에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 남는 것처럼, 건물에도 지난 세월의 흔적이 남습니다. 작가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그런 지점입니다. 창문을 열고 닫느라 벽에 남은 흔적, 녹슨 철제 창문, 다른 모습으로 벗겨진 페인트, 창에 붙어있는 조그만 스티커….
오래된 건물들을 그리기 시작했던 건 언젠가 사라질 현재를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오랜 일터인 을지로와 나고 자란 동네는 둘 다 재개발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상상이나 희미한 기억에 의존한 기억이 아닌 사실적인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장소의 지번으로 붙였습니다.
“실제로 제목을 보고 그 건물을 찾아볼 수도 있잖아요. 친구들도 제 그림을 보고 “여기가 우리 동네야?” 묻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 더 남게끔 하고 싶어요. 곧 없어질 풍경이지만 그 풍경을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죠. 전시를 보러 오시는 분들 중 실제로 그림 속 동네에 사셨던 분들이 꽤 많으시더라고요.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럴 때면 ‘그리기를 잘했다, 남겨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청야(靑夜), 장지에 혼합재료, 40x100cm, 2022. ⓒ강지현
그림 속 모든 장소는 작가가 실제로 방문한 곳입니다. 작가는 “창작에 앞서 일상 풍경을 몸소 체험하는 것을 우선한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이미지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풍경은 사진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아요. 제가 직접 경험한 장소를 그리는 건 영상을 그리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곳의 생동감, 시간과 소리를 모두 기억하니까요.”
#동양화 #푸른빛 온기
계절별로, 시간대별로 찍어 놓은 사진들 중 마음에 드는 풍경을 골라 구도를 잡고, 먹지로 먹선을 따라 그립니다. 작업 과정 중 가장 품이 많이 드는 과정은 구도를 짜는 과정입니다.
“을지로를 그렸을 때는 도시 속 공존을 담아내고 싶어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를 많이 사용했죠. 최근에는 한 건물이 갖고 있는 특징에 집중해 부분을 자세히 그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작업 중인 강지현 작가 ⓒ강지현
작업 중인 강지현 작가 ⓒ강지현
장지를 푸른색으로 엷게 덮어 배경 처리를 하고 난 후에는 또 먹을 묻혀 건물의 외벽 등을 묘사합니다. 그림에서 깊이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먹이라는 재료가 가진 무게감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분채를 사용해 채색합니다.
특유의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는데요. 프린트처럼 깔끔한 느낌을 선호해 질감보다는 색에 중점을 둔다고 합니다.
“어두운 밤하늘이라도 같은 푸른색이 아니고, 빛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노란색이 아니잖아요. 그 장소가 제게 주었던 인상을 바탕으로 매번 새로 색을 정합니다.”
작업 중인 강지현 작가 ⓒ강지현
작업 중인 강지현 작가 ⓒ강지현
작업 중인 강지현 작가 ⓒ강지현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꾸준히 동양화의 재료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강지현 작가는 그 이유를 “한국화 특유의 ‘숨구멍’이 느껴졌으면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풍경들은 하나하나 저에게 의미가 있는 공간이에요. 어릴 적 놀이터에서 언니와 놀았던 기억, 슈퍼에서 군것질거리를 사 먹었던 기억 등 안 가본 곳이 없는 동네거든요. 이 그림을 그리며 오로지 이 풍경에 집중할 수 있고, 그게 정말 하나하나 기억에 남으니 저에게는 앨범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같이 느껴져요.”
푸르게 덮인 온기, 장지에 먹, 석채, 분채, 390x162.2cm, 2020.ⓒ강지현
짙푸른 어둠이 드리운 도시를 밝히는 강지현의 노란 불빛들은 망망대해 저 멀리서 보이는 노란 등대의 불빛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빛들이 가지고 있는 따스한 이야기를 작가는 쌓아가고 있습니다.
ARTTAG 변혜령 에디터
작업 중인 강지현 작가 ⓒ강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