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동양화 #풍경화 #선 #단색화 #주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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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ANCTUARY FOR MIND
Simple, repetitive lines have a lot of power. By transforming any form through line, the work presents a world with the potential of abstraction and transcendence. The act of drawing a line is not only pleasurable for me, but also makes me reflect on myself. I experience a state of mindfulness, concentration, and immersion through repeated line drawings. The landscapes I paint with lines are places that feel like sanctuaries to me, but I want the public to look at my paintings and think of their own sanctuaries. The happiness and meaning of small things in life is very special for me. I hope that many people who look at my work will feel these touches through my work.
이상헌의 풍경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응시한 풍경인 듯합니다. 짧은 선들을 쌓아 만든 희미한 형체는 관람객을 어렴풋한 기억으로 이끕니다.
별이 쏟아지는 푸른 밤하늘은 꿈속 한 장면일까요, 어린 시절 기억의 단편일까요.
이상헌 작가를 만났습니다.
별 하나에 그리움, 110×55cm, 장지에 채색,먹,아크릴, 2022. ⓒ이상헌
Chapter 1.
오랜 풍경을 보다
Combination ⓒ이상헌
이상헌 작가가 어렸을 적부터 보아왔던 것은 방 안에서 무언가를 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한복 문양을 디자인했던 아버지가 천 위에 그림을 그리면 어머니가 하나하나씩 실을 겹쳐 그 위를 메워 나갔습니다.
이상헌 특유의 선을 중첩시켜 그리는 작업 방식에는 무의식에 축적된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대학 졸업반 시절, 도시의 일상을 그린 그림에서 비어있는 벽을 먹선을 겹쳐 표현한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우연한 일이었지만 문득 아버지의 선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림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을 전체로 확장시켜 그리면서 그의 선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100호 그림을 십여 개 연달아 그릴 만큼 작업에 빠져있었다고 이 작가는 회고했습니다. 내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동력이 됐습니다. “한두 점씩 그리며 쌓인 나의 작업을 가지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갈망 같은 것들이 생기면서 (작업에) 불이 붙었죠.”
숨결-토기, 165x130cm, 장지에 채색,먹, 2006. ⓒ이상헌
2007년 석사를 마치고 연 첫 개인전에서 이 작가는 짧은 선을 반복적으로 중첩해 그린 그림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입주 작가로 있었던 금호미술관 작업실에서 보이는 일상의 풍경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후 남대문과 이순신 장군상 등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장면을 그리며 스쳐 지나간 풍경들을 종이 위에 포착하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풍경은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되죠. 없어질 수도 있고,똑같은 상황이어도 훗날엔 달리 보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리고 싶어요. 제 기억 속에 있는 풍경을 그림 속에 그대로 담고 싶은 마음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 같아요.”
The wind blows, 105x72cm, 장지에 채색, 먹, 아크릴, 2013. ⓒ이상헌
Chapter 2.
선, 마음에 쌓이다
또 다른 풍경, 91x72.5cm, 장지에 혼합재료, 2016. ⓒ이상헌
#선 #풍경
원초적이고 반복적인 선은 이상헌의 종이 위에서 꾸준히 변주되어 왔습니다. 유학을 앞두고 아버지의 뇌경색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시절, 선은 감정을 분출하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선을 그어놓고 다음 날 보면 슬픈 날에 그은 선은 왜 이렇게 흩날리는지.
(선에) 내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이 투영되는 것 같아요. 더 나아가 제 작업에 그 감정이 반영되는 걸 느낍니다.”
그의 작업에서 선은 표출의 수단이지만 모순적이게 형체를 가리는 도구로도 사용됩니다. 그림 속 풍경은 선을 통해 희석됩니다. 작가의 개인적인 풍경이 모두의 정경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마치 거울처럼 관람객들이 작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랜드마크나 빌딩 등으로 추측이 쉬운 도시 전경을 잘 그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제가 그리는 풍경은 저에게 안식처처럼 느껴졌던 곳들이긴 하지만, 대중들이 제 그림을 보면서 각자의 안식처를 떠올렸으면 합니다.”
위로하는 풍경, 130.3x97cm, 장지에 채색,아크릴, 2020. ⓒ이상헌
여러 겹의 선을 쌓아 깊이감을 주기 위해서는 세필 붓의 옆면만을 사용해 선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대여섯 번 선을 그리면 금세 붓이 말라 다시 먹을 묻혀 그리기를 반복합니다. 이 작가는 수 시간에 걸쳐 선을 쌓으면 ‘무념의 상태’에 도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고통스럽지 않냐고들 많이 물어요. 짧은 선으로 화면 전체를 메꿔야 하니 쉬운 작업은 아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반복하는 일이 즐거워지고, 일말의 위로와 평온마저 느낍니다.”
작가에게 선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선을 긋는 행위는 아주 기초적인 행위예요. 한국화를 배울 때도 처음 먹물을 붓에 묻혀 선을 그리는 것부터 배우거든요. 누구나 어릴 적 선을 그으며 놀고요. 어린 아들이 행복하게 선을 그리며 노는 모습을 보면, 내 안에도 저 모습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죠."
선을 반복해 그리는 과정이 인생과 닮아있다고도 했습니다.
"선을 쌓으면서 자연의 형체가 드러나고 지워지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이 중첩되고 새로운 사건을 겪고 또 겪으면서 인생도 완성되지 않나요."
바람이 분다, 162×97cm, 장지에 채색, 먹, 아크릴, 2019. ⓒ이상헌
Chapter 3.
새로운 선을 긋다
우리 지금 여기1, 2, 72.7×60.6cm, 장지에 채색, 아크릴, 2022. ⓒ이상헌
#한국화 #노란색 #아크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가족이 늘면서 그의 그림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큰 반응을 얻었던 별 연작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보던 창밖의 하늘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재료의 사용도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한국화의 기초적인 재료에 노란색 아크릴 물감이 더해졌습니다.
“어떻게 물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여러 가지 재료를 써봤는데 아크릴 물감이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문득 모든 계절엔 노란색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종류의 노란 물감 중 한 색을 골랐습니다.”
서양화와 한국화의 재료를 모두 섞어 사용하지만 이 작가는 자신을 여전히 ‘한국화 화가’라고 소개했습니다.
“제 작업의 기반은 한국화예요. 전체적인 재료와 기법은 한국화에 뿌리를 두고 있죠.”
짧은 선이 중첩되어 있지만 산만하지 않고 차분한 그림은 은은한 색감 덕분입니다. 한 톤 안에서 풍부하게 색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아버지의 영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복을 보면 화려하게 느껴지지만 그 색은 은은하잖아요. 은은한 색감도 충분히 강렬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주사기
작업의 소스는 대부분 여행에서 얻습니다. 마음을 흔드는 풍경을 만나면 사진으로 기록해 놓았다가 한지를 여러 겹 쌓아 만든 장지 위에 드로잉하고, 아교를 섞은 분채로 색을 쌓아 나갑니다. 이어 주사기를 사용해 노란 아크릴 물감을 짜내 마무리합니다. 장지 위에 물리적으로 쌓이는 아크릴 물감은 스며들어 아득한 깊이감을 주는 분채 채색과 대비되며 물성을 극대화합니다. 주사기를 사용해 균일하게 물감을 짜내는 과정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섬세함을 위해 맨손으로 몇 시간씩 작업하다 보면 손을 다치기 일쑤고, 겨울이면 물감이 쉽게 굳어 작업 속도가 더뎌지기도 하죠. 하지만 이 작가는 웃으며 “고생해야 원하는 그림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밤, 하염없이 별빛이 흐른다, 53×45cm, 장지에 채색, 먹, 아크릴, 2022. ⓒ이상헌
한 여름 밤, 그대가 생각나는 밤, 110×55cm, 장지에 채색, 먹, 아크릴. 2022. ⓒ이상헌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십여 년간 빛을 보지 못했던 시절에도, 컬렉터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지금도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이 작가는 앞으로도 ‘잘 버틸 자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축복받은 사람이죠. 작가가 된 이상 평생 그림을 그리게 될 텐데, 앞으로도 ‘즐겁게’ 그리고 싶습니다.”
그의 그림 속은 고요한 여름밤, 풀벌레는 울고 별은 지금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합니다. 지친 날 가끔 꺼내어 보는 나의 오랜 풍경을 발견합니다.
ARTTAG 변혜령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