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FINE ART
여기 제주의 풍경을 그리는 작가가 있습니다. 노란 종이 위 파란 선으로 그려진 풍경에서는 제 주의 젖은 바람이 불어오는 듯합니다. 다정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정다은 작가를 만났습니다.
정다은 JEJU 2022
정다은 작가는 제주를 그리는 작가입니다. 그는 7번의 제주 여행을 통해 수집한 풍경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제주의 풍경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시기’가 온 거예요. 뭘 그려야 할 까 생각했는데 도저히 모르겠는 거죠.”
이것저것 그리다가 든 생각은 ‘이건 아니다’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그린 ‘가짜’라는 생각이 들 었어요. 못 그려도, 이상해도 괜찮으니까 가장 솔직하게 그릴 수 있는 것을 그리자.”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제주 여행이었습니다. 제주 여행은 가장 솔직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 다. 작가는 자연의 거대함과 위대함 앞에서 위로와 경외감을 모두 느꼈습니다.
”하루는 파라솔을 빌려서 해변에 하루 종일 앉아있었어요. 계속 멍 때리고 있으면서,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작은 존재구나. 정말 별거 아니구나. 그러니까 뭘 해도 괜찮겠다….’ 제주에서 비 우고 오면 채울 수 있는 용량이 늘어나는 기분이었죠.그래서 계속 갔던 것 같아요.”
작가는 솔직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따라 꾸밈없는 자연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 풍 경은 제주의 풍경인 동시에 그의 마음속 풍경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 들을 나열한 후 기억과 상상을 토대로 재구성해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공기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작가는 처음 들판을 초록색 덩어리로 바라봤습니다.
어느 순간 초록색 덩어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키 작은 풀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 순간을 선물한 공기의 움직임을 담아냈습니다. 제주의 색도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동백꽃의 다홍빛, 넘실대는 제주 바다의 옥빛, 구멍이 숭숭 난 돌의 까만 빛은 정다은만의 팔레트가 되었습니다. 제주를 그리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색 들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건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정다은 의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등 색을 골라 저만의 팔레트를 만들었어요. 그 안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고 색을 사용해요. 또 제주도에 가면 신경 써야 할 것이 없고 시간은 많으니 경치를 바라보게 되는데, 제주의 색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서울의 돌은 회색인데 제주의 돌은 까매요. 그런 색깔을 구현하 려고 하다 보니 저만의 색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높이날고_멀리보는_새의눈으로
새는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그는 새의 시선을 빌려 캔버스 위를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습니다.
“유치할 수도 있지만 집에서 작업만 하다 보니 훨훨 날아다니면서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 이 있었어요. 그림 속의 새는 자유롭게 여행하 잖아요. 높이 날 수도, 땅에 있을 수도 있죠.”
정 작가는 자신의 새를 ‘높이 날고 멀리 보는 새’로 소개했습니다.
“높이 날고 멀리 본다는 표현을 인생에도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어떻게 보면 제 목표예요.” 높이 날기 위해 궂은 날이든 맑은 날이든 매 일 날아오르는 새처럼, 작가는 성실함으로 매일을 채우고 있습니다. “항상 뭔가를 뛰어나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냥 해요. 지금은 그게 제 재능인 것 같아요.”
안정적인 회사원의 삶을 포기하고 작가의 삶을 시작할 때도 ‘꾸준히’의 힘을 믿었습니다. 방 에 틀어박혀 아침에 일어나 잠이 들 때까지 그림에만 몰두했습니다. 무언가 막힌 것 같을 때에 도, 스스로가 의심스러울 때에도 ‘그냥’ 그림을 그리다 보면 한 단계, 한 단계 깊어지고 있었다네요.
“눈뜨자마자 작업을 시작해 자기 전까지 내내 그림만 그렸어요. 때론 너무 답답한 순간도 오곤 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해야죠. 그 시간을 돌이켜보면 나에게 온전히 몰입해서 뭔가를 해내려고 집중했던 시간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더라고요. 그냥 하다 보니 나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제 그림이 필요하다는 곳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2022년 인기리에 종영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의 만남도 작가의 성실함 덕분이었습니다. 몇 해 전 낙선한 공모전에서 작가의 그림을 기억하고 있던 주최 측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연락을 해 작업을 하게 된 겁니다.
#하나의_장면에서_하나의_이야기로
이제 정 작가는 차곡차곡 쌓인 풍경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제 그림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각 그림이 하나의 컷이 되어 커다란 이야기를 이루는 거죠. 이 그림에서 차를 타고 가면 이 그림이 나오고 또 이 그림이 나오고, 그런 식으로 계속 연결되거든요.”
그림 속 장소만 확장된 것은 아닙니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회화와 일러스트를 오가며 활 동하고 있고, 판화와 아트콜라보 작업으로까지 경계를 넓혔습니다. 컷(cut) 형식에 관한 아이 디어는 인상 깊게 보았던 만화의 이미지에서 왔습니다.
“그림은 당연히 화판에 그려야 하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갤러리에 걸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림이 적용될 수 있는 곳은 정말 다양하더라고요.”
신중하고 단단하지만 발걸음은 더없이 경쾌한 정다은의 세계는 앞으로도 더 넓어질 예정입니다.
“제주로 시작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풍경들을 그려내고 싶어요. 새로운 풍경을 더할수록 그림 속 세계관도 확장되겠죠. 올해는 독일에 가게 됐는데, 독일의 풍경을 어떻게 그릴지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