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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OWN SOLITUDE
‘Solitude’ is an important keyword that runs through artist Son Jeong-ki’s works. The solitude he speaks of is not simply a lonely and lonely feeling. “If loneliness is a lack caused by the absence of others, solitude is a time spent voluntarily,” explains the artist.
캔버스에는 하늘까지 닿은 나무들이 빽빽합니다. 눈으로 덮인 하얀 세상은 고요하고 뺨에 닿는 공기는 차갑습니다.
이 고요한 숲을 함께 걸으며,
고독의 문 앞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손정기 작가를 만났습니다.
ⓒ작업 중인 손정기작가
Chapter 1.
변곡점: 더하기가 아닌 빼기
A Solitary Walk, Acrylic on panel, 116.8 x 91cm, 2022. ⓒ손정기
2018년, 작가는 훌쩍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부상으로 전공하던 드럼을 그만둔 후 한창 작업에 열중하던 때였습니다. 작업, 미래, 유학…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풀기 위해서였죠.
“그땐 계속 나에게 뭐가 더 필요한지,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어요. 계속 더했는데도 불구하고 만족이 안 되는 거예요. 작업도 그렇고 제 삶도 그렇고요. 그래서 바꿔 생각해 봤죠. 더하지 말고, 필요 없는 것을 빼보자고요. 하나둘씩 비워내다 보니까 가장 중요한 것들만 남더라고요. 그게 저에게 해답처럼 느껴졌어요.”
조용한 제주의 숙소에 머물며 생각을 한 겹씩 덜어냈을 때, 남은 건 의외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일 년 가까운 프랑스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쫓기는 것도 없고, 해야 할 일도 평가받을 일도 없고, 그리고 싶을 때만 그림을 그리고…. 사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돈이 없었던 시기거든요. 그런데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약간 부족한 듯 살 때 오히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있잖아요.”
무작정 떠난 프랑스에서의 10개월은 어떤 의무나 평가 없이, 온전히 나에게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현재를 즐기고 가진 것을 충분히 누렸습니다.
ⓒ작업 중인 손정기 작가
손정기, 밤의 경계에서, Acrylic on canvas, 100 x 80.3cm, 2020.
서울로 돌아와 처음 완성한 대형작 ‘밤의 경계에서’에서 그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거친 필치로 완성된 검은 절벽과 대조되는 조그만 사람의 형체는 위압감과 함께 이유 모를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그림은 더욱 단순해졌지만, 작가에게는 그 심플함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고요.
“눈에 보이는 것 위주의 작업에서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작가는 귀국 이후 처음 선보인 개인전 <밤의 경계에서>(2020)를 통해 본격적으로 눈 덮인 숲 사이를 걷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지에 치중했던 초기 작업에 비해 ‘자발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이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Chapter 2.
고독: ‘나’라는
여백을 탐험하기
A big tree. Acrylic on canvas 117x91cm 2022 ⓒ손정기
‘고독’은 손정기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그가 말하는 고독은 단순히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이 아닙니다. “외로움이 타인의 부재로 인한 결핍이라면, 고독은 자발적으로 갖는 시간”이라고 작가는 설명합니다.
“보통 우리가 고독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일 때가 많잖아요. 그런데 제가 10개월 동안 프랑스에서 보낸 시간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고독의 시간 동안 저는 내적으로 성장했고, 자유로웠어요. 자발적인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나 각종 뉴스와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침묵과 고독은 때론 낯설게 느껴지곤 하죠. 작가에게 ‘자발적 고독’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저는 무리를 해서라도 그런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주중에 회사를 다닌다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조용한 곳에 다녀온다든지,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컴퓨터나 핸드폰 없이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든지요.
왜냐하면 분명 떠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지침이 있거든요. 막상 떠난 후에야 ‘내가 지쳐있었구나’ 깨닫게 되죠.”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그저 알아차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에서 고독의 시간은 명상과도 닮아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뭔가를 얻어야 한다는 마음이 또 다른 강박이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쉬는 동안 그림 10장을 그려야지, 이 책 한 권을 다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그건 쉬는 게 아니잖아요. ‘쉰다’는 일을 하는 거죠. 멍을 때리더라도 내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알게 된다면 이미 그 시간은 충분히 값진 것 같아요. 인생에 문제가 있을 때 실질적인 해결뿐만 아니라 그냥 그걸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해소가 될 때가 있더라고요.”
명상은 작가의 오랜 습관이기도 합니다. 작업을 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질 즈음이면 짬을 내어 명상을 합니다. 그러나 자세를 잡고 눈을 감는 것만이 명상의 방법은 아니라고 명상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복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도 명상의 일종이라고요.
“차분하고 명상적인 마음으로 작업을 할 때도 있고, 생각이 많을 때는 그림을 그리다가 생각이 정리되거나 고민의 답을 얻을 때도 있어요. 그림을 그리는 순간 자체가 저에게는 명상이 되고 사색이 되고…”
ⓒ작업 중인 손정기작가
Chapter 3.
당신을 문 앞으로
데려다 놓는 예술
손정기, Shelter, Acrylic on canvas, 116.8 x 80.3cm, 2023. ⓒ손정기
손정기 작가의 이미지는 강렬합니다. 대자연 속을 걷는 한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동화 속 삽화 같기도, 혹은 일종의 시각적 아포리즘 같기도 하죠. 오랜 시간 자연에 관심을 두어 왔다는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친근한 풍경이 아닌 우리를 압도하고 침묵하게 하는 대자연의 풍경을 그립니다. 작가는 우리를 압도하고 침묵하게 하는 대자연의 풍경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거대한 자연의 이미지는 삶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는 삶에서 종종 무력감을 느끼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결국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가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자연 가운데 있는 사람의 이미지가 시각적으로는 굉장히 연약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 강인함을 느껴요.”
이 외에도 그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집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자 피난처를 의미하고, 거울처럼 대상을 반사하는 물은 자신을 비춰보는 사색의 도구입니다.
거대한 자연 속을 산책하듯, 순례하듯, 탐험하듯 걷고 있는 한 사람을 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이 아무개 씨는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 걸까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요?
“그리기 전에 (상황을) 생각하긴 해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리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요. 내가 이 공간에 홀로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얼마나 고요할까 상상하는 편이에요.”
ⓒ작업 중인 손정기작가
Into The Silent Forest, Acrylic on panel, 116.8 x 91cm, 2022. ⓒ손정기
숲을 향해 걸어가는 <In to the silence> 시리즈는 평소 작가가 명상을 하며 되뇌던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는 문장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재구성한 작업입니다.
그림 속 장소들은 작가가 실제로 다녀온 장소이기도 하지만 때론 상상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영화나 음악에서도 영감을 얻습니다. 평소 요한 요한슨, 올라퍼 아르날즈, 시규어 로스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좋아하는 음악가들을 모아 놓고 보니 신기하게도 다 추운 나라 작곡가들이더라고요. (웃음) 올해 초에 핀란드를 갔었는데 한 달 정도 있다가 왔어요. 머문 곳이 산골마을이었거든요. 가끔 지나가는 차 소리 말고는 바람 소리밖에 안 들리는 거죠. 봄여름의 자연은 소란스럽잖아요. 동물 소리와 사람들 소리도 들리는데 겨울은 사실 모든 게 다 죽어있어요. 겨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음악은 겨울의 그 고요함이 느껴져요. 자연의 고요함이라고 할까. 요란하지 않은 겨울바람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영향을 받은 창작자로는 영화감독 드니 빌뇌브를 꼽았습니다.
“영화마다 몇 번씩 봤는데, 가장 힘을 줘야 하는 순간에 가장 힘을 빼거든요. 그게 제 작업에 큰 중심이 되어준 것 같아요. 구도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았고요. 배경은 아주 크고 사람은 아주 작게 잡거든요. 그림을 그릴 때 구도에도 제일 신경 쓰는 편이죠.”
저는 그 감독이 정말 좋은 게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니라 항상 딜레마의 경계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는 이것과 이것이 있어. 우리는 그 경계에 서있는 존재일 뿐이야’라고요. 저도 그런 작품을 하고 싶어요. 저는 작업으로 누군가를 치유하거나 위로할 생각은 없어요. 자신의 내면에 들어가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도록 그 내면의 문 앞까지만 데려다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작업 중인 손정기작가
손정기 작가의 작업에는 여러 가지 감상이 뒤따릅니다. 잡음 같던 생각이 차분히 가라앉는다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는 후기도 눈에 띄죠. 관람 포인트를 물었습니다.
“제 작업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한 시간을 누리게 하는 거예요. 일상생활에서 자발적으로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갖는다는 게 힘든 일이잖아요. (그림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전을 열 때마다 전시장에는 항상 의자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관람객을 사색으로 초대하는 작가의 배려입니다.
“앉아서 천천히 감상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요. 무조건 오래 보라는 게 아니에요. 그게 15초더라도, 집중해서 감상하셨으면 좋겠어요.”
Together In Solitude, Acrylic on canvas, 80.3x116.8cm, 2023. ⓒ손정기